(15~21은 내가막넣은것) [포토세상] 아빠가 들려주는 도자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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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포토세상] 아빠가 들려주는 도자기 이야기

 

아빠가 들려주는 陶瓷 이야기

 

아들아! 오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소장품이 많은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는데 괜찮았니?, 전시관이 크고 넓어서 다리도 아팠을 것이고 휴대폰도 가지고 놀지 못하고 엄마 아빠와 함께 긴 시간 좀 지루하기도 했을 것 같기도 한데, 박물관입구에서 창문으로 남산타워를 보니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았니.”

 

아빠, 솔직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별로 없어요. 학교에서 배운 것도 있고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잘 몰라서 그런지 모두 옛날 물건들만 전시되어 있어서요.” “그랬구나,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선조들이 사용한 유물의 소중함을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고, 또 소중한 물품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일거야, 아빠도 수 십 년간 이런 도자기 등 각종 유물들을 모아 작은 박물관을 개관하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지만 늘 배운다는 자세로 몇 십 년 째 관련 책을 보거나 전국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서 관람하고 사진으로 담으면서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단다. 그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역사공부는 짧은 기간에 모두 알기는 어렵단다.”

 

아빠는 오늘 많은 유물 중 특히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너희들은?” “솔직히 지금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 많은데 옛날 것은 별로예요.” “빙고, 아름다움이나 편리성만 따진다면 현대 도자기들이 아주 멋지고 훌륭하지, 그건 나도 동감한단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한 물건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쳐 단계적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지.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아빠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가능한 쉽게 설명해 볼게.”

 

도자기는 쉽게 말해서 흙을 이용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 종류란다. 도자기는 굽는 온도에 따라 1,300도 보다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은 도기, 그 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은 자기라 하지. 도기 가운데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을 토기라고 하는데, 토기는 600~1,000도에서 구운 질그릇으로 부르며 실생활에서 사용했단다. 토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구멍들이 많아서 숨을 쉰다고 하여 지금도 조선시대 장독은 인기도 좋고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지. 자기는 고온에서 구워야 하므로 높은 기술이 필요하고 특별한 흙인 백토가 필요하단다. 우리 집에서도 도기와 자기를 구분하는 쉬운 방법은 예리한 송곳 등으로 살짝 긁어서 흔적이 생기면 도기, 아니면 자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도자기를 시대별로 특징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는 불을 사용하여 불을 피웠던 자리 주변 흙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600-700도 온도에서 굽었고, 청동기시대는 모래가 섞인 흙으로 토기를 만든 다음 그릇의 안팎에 부드러운 진흙을 바르고 녹이 쓴 쇳가루를 흑연가루와 기름칠을 해서 표면이 매끄러운 광택이 나고, 삼국시대는 1,0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더욱 단단하고 회색을 띠게 되었지, 그 이유는 가마 속에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산소가 부족해서 색이 변한거야. 특히 가야나 신라 토기는 자세히 살펴보면 생활에 편하게 사용되던 토기가 아니라 제사나 의식 때 사용되고, 이런 토기들은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묻어준 것인데 모양이 다양하고 기술이 뛰어난 것들이 많단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의 문화가 서로 융합되었고, 토기들이 실용적으로 항아리나 비슷한 모양의 토기들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녹유토기는 가마에서 불을 땔 때 그 재가 일부 도자기 표면에 흙과 합쳐져서 반짝반짝 윤이 나게 되는데 이것이자연유약이라하지. 이것에서 배워 나뭇재와 흙을 섞어 녹색과 갈색의 유약을 만들어 사용해 보니 색이 고르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유약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에서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 이였단다.

 

고려시대는 이미 중국에서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 청자를 만들었지만 그 기술은 비밀에 붙여 다른나라 사람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중국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단다. 비록 고려 초기 청자는 색도 이상하고 유약도 고르지 않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아주 훌륭한 도자기였지. 고려 중기 이후부터 훌륭한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오늘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려청자는 대개 이 때 만들어졌고 색도 비취색으로 아주 멋진 도자기란다.

 

청자를 점차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상감기법이야. ‘상감기법이란 원래 금속공예에서 사용되던 방식인데, 고려 사람들은 굽기 전 도자기에 날카로운 칼로 홈을 파고, 그 홈에 바탕과 다른 색의 흙으로 채워 넣어 무늬를 만들어 내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섬세하고 표현을 할 수 있어서 도자기 하나에 수 십 수 백 마리의 학을 새겨 놓을 정도로 섬세한 장식이 가능했지. 고려청자에 사용된 상감기법은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기법이 들어가 의미가 더욱 깊단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나라의 운이 기울고 사회가 어지러워지게 되고, 왜구들이 큰 무리를 지어 우리나라로 쳐들어 와서 바닷가 마을을 약탈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어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왜구로부터 보호하려고 바닷가 부근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여 바닷가의 청자 가마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되고 도공들이 살길을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어. 이렇게 해서 체계적인 관리 아래서 만들어 졌던 훌륭한 고려청자는 더 이상 만들어지기 않고 아쉽게도 제작기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단다.

 

그 당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아끼던 물건이나 저승에서 필요한 물건을 무덤 안에 넣어주는 풍속이 있었지, 고려시대 왕족이나 귀족이 죽어 묻힐 때 고려청자도 몇 점씩 매장했단다. 고려사회가 끝나고 500여 년간 청자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후세 사람들은 청자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었단다. 당시 왜구들이 우리나라에 침략하여 무덤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던 고려청자를 도굴하기 시작했어, 예를 숭상하는 우리는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로 여겼단다. 그래서 그때까지 고려시대의 무덤들이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었는데 왜구들이 한 몫 잡겠다고 오래된 무덤을 파헤쳐 유물을 훔쳐 간 거야, 당시 고려의 서울 이였던 개성부근의 왕릉과 큰 고분들이 거의 도굴 되다시피 했지, 이 때 수많은 고려청자가 일본으로 흘러갔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

 

조선시대는 고려가 무너지면서 청자의 시대가 가고 분청사기의 시대가 열렸단다, 조선시대하면 백자가 대표 도자기 아니냐고 하겠지만, 백자에 앞서 나온 것이 분청사기란다. 분청사기는 격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단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청자 가마들이 해안에서 문을 닫게 되면서 도공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고려시대 체계적으로 청자를 만들 때와는 달리 재료의 질이나 색감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그래서 도공들이 밝게 보이라고 도자기에 하얀색 흙을 칠하기 시작했지 - 마치 여자들이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처럼 - 민간에서는 일정한 격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도자기를 만들어 모양이 좀 어그러지거나 그림 실력이 모자라도 상관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만들어진 시기와 지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양을 보인단다. 분청사기는 청자보다 대중적인 도자기이기 때문에 장식기법도 시간과 힘이 덜 드는 쪽으로 만들어 사용했단다. 회색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도자기로 안정감이 있고 실용적인 모양이 많단다. 왕실과 관청을 중심으로 사랑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등 시대상황으로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소멸되어서 많이 아쉽단다.”

 

조선백자는 화려함보다는 청결과 검소한 삶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이념 때문에 크게 발전했지. 세종대왕은 중국의 백자를 보고 감탄하여 만들어 보고 싶어 했지. 우리기술도 뛰어났지만 아직 백자를 만들 수 없었거든, 중국은 정덕진이라는 곳에 어기장이라는 중앙관요를 두고 뛰어난 도공들이 모여 왕실에서 사용할 백자를 만들고 있기에, 우리도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설치했지, 이 관요 이름이 분원이야, 분원의 뜻은 사옹원의 분원이란 뜻인데 사옹원은 궁중에서 음식과 잔치를 담당하는 부서로 사옹원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광주에 있는 분원에서 만들었지. 쉽게 이야기하면 분원은 왕립도자기 제작소였어, 가장 솜씨 좋은 도자기 장인들이 만들고,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화원 화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아주 훌륭한 백자를 만들게 되었단다. 백자는 바탕이 희다보니 정갈한 그림을 그려 멋을 부리기도 하였고, 더러는 아무런 그림 없이 그 자체의 넉넉한 모양을 즐기기도 하였다. 현대 가장 인기 있는 달 항아리는 이 때 만들어 졌단다. 우리 집에 있는 한 아름이 넘는 달 항아리가 멋지지 않니.

 

아빠가 우리선조들이 사용하신 멋진 도자기 역사를 간단하고 쉽게 설명했지만 아마 너희들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역사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 우리 유물의 소중함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매우 안타깝단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 중 특히 우리역사와 문화를 중요시하고 배워야 하는데 현실은 국영수 등의 공부에 매진하니 솔직히 할 말이 없단다. 누구를 탓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어른인 우리 모두의 탓으로 돌리고 앞으로는 자라나는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란다.

 

아들아,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우리가 사랑하고 보전·발전시켜야 하지 않겠니.”

 

by 포토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