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이며 철학인 춤
7월의 첫 주말, 초여름 장마에 하늘은 곧 비를 뿌릴듯 찌푸려 있었다. 뭉근한 공기가 머무는 서울 남산 국악당. 어둠 속 공연장 전면의 막에 화면이 띄워졌다. 벽사 한영숙 선생의 삶을 담은 추모 영상이었다. 한영숙춤보존회(회장 이애주)에서 주최, 주관한 벽사 한영숙 선생 30주기 추모 공연은 추모 영상으로 시작해 학무, 살풀이춤, 태평무 그리고 승무를 무대에 올렸다. 90여 분 동안 이어진 추모 공연은 한영숙 선생의 제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이애주 교수가 승무로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조선조 말 명무가, 명고수로 우리의 전통춤을 집대성한 한성준의 예맥은 손녀인 한영숙에게 전해졌고 이제는 이애주 교수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공연으로 이애주 교수를 만나고 일주일 뒤,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과천의 연습실을 찾았다. 북과 장구를 울리며 연습을 해도 방해를 끼칠 일 없는 산마루 한적한 곳이었다. 이애주 교수는 금방 마당에서 뜯은 허브로 차를 우리며 승무에 대해 얘기했다.
“‘천부경’은 81자로 된 인류 최초의 경전이에요.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통해 하늘과 땅, 인간의 원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춤이란 것은 천부경에 나오는 천지인 원리를 담고 있는 동작입니다. 자연의 움직임, 삶의 몸짓 그 자체가 춤이죠.”
우리 춤의 동작은 자기 자신을 바라봄에서 시작한다. 승무를 보더라도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어 절하는 것이 첫 움직임이다. 이애주 교수는 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자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부터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빼고 덜고 할 것 없이 완벽하게 정립되어있는 춤이 바로 승무라고 단언한다.
“승무는 깊은 철학을 담은 예술이자 춤이죠. 춤 이름 자체가 불교와 연결되지만 종교를 뛰어넘어 우리민족의 정신이 정리된 철학이며, 영혼의 춤으로 봐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요. 춤을 추거나 볼 때도 그렇고요.”
특히 젊은 세대가 환호하는 춤은 아이돌 그룹의 역동적인 비트와 현란한 기교의 춤이다. 전통춤은 눈과 귀로 즐기는 춤과는 다르다. 마음에 깊이 들이지 않으면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힘들다. 빨라야 하는 시대지만 빠르기에 외면하기 쉬운 가치들을 누군가는 본연 그대로 놓치지 않고 있다.
온전히 춤과 함께한 일생
“다섯 살 때부턴가 춤을 시작했나 봅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냥 좋아서 움직인 것이죠.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저절로 춘 거예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애주 교수는 유치원 때부터 춤에 소질을 보여 여기저기 뽑혀 다녔다고 한다. ‘어린애주’를 예술인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은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을 당시 국립국악원에 있던 김보남(궁에서 마지막 무동을 섬)에게 맡겼다. 이때 승무는 물론 궁중 정재와 춘앵무, 검무까지 익혔다. 여중·고시절과 대학시절에는 학생 무용 콩쿠르, 전국무용콩쿠르, 문공부 신인예술상 등을 수상하며 전통춤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다.
한편 이애주의 춤 인생은 1969년 한영숙 선생의 첫 전수자로 들어가면서 또 한 번 탈바꿈하게 된다. 그해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한영숙 선생이 그를 첫 제자로 뽑아 완판 승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974년 <이애주 춤판>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를 다니며 한국 전통춤의 가치를 빛냈다.
“스승님의 춤을 보면 그저 팔 하나 들었을 뿐인데 그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지요. 살아온 삶이 그냥 흉내내는 걸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들 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계속 추다 보니 어느 순간 ‘도대체 이게뭘까’ 의문이 들더군요. 춤이 무엇이고 사는 것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한 거죠. 나 자신을 보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 자연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춤의 본질을 연구해나갔죠. 춤은 몸짓 으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전통춤에 대한 정리가 필요 했습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이애주 교수는 춤의 정신과 본질 탐구에 집중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리대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해 전통춤 이론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처용무의 사적고찰」, 「춤사위 어휘고(考)」 등의 논문을 쓰기도 했다.
가득 차 있지 않지만 충만한 아름다움
“우리 춤은 자연에서 나왔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춤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본성, 그 자체가 승무의 몸짓이죠. 가장 겸손한 춤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더욱 진솔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승무, 그리고 우리 춤은 동작 하나하나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심오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춤은 우리민족의 삶과 고유의 심성을 담고 있기에 한 발만 다가서면 그 고유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닿는다.
“느린 춤만이 아니라 빠른 춤사위에도 분명 순간순간 멈춤이 있어요. 언뜻 보면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느려 움직임이 안 보이죠.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입니다. 사실 그 멈춤이 춤 동작의 핵심이에 요.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한시도 쉬지 않고 활동할 수는 없어요. 활동을 멈추고 쉬는 순간에도 호흡은 흐르고 맥이 뛰듯이 춤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전통문화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가득차 있지 않지만 충만하고,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안에 동(動)을 품고 있다. 이 땅의 자연의 품성과 이땅에 살아온 이들의 호흡을 닮은 아름다움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합니다. 이수자들을 가르치면서 제 스스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죠. 사는 게 다 배움이거든요. 배우는 게 끝이 없어요. 한 가지 꿈이있다면 제대로 된 춤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아직 세계 어느 나라에도 춤 자체와 춤 안에 내재된 정신과 철학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대학은 없거든요. 그러한 춤학교를 세워서 우리 후손들, 그리고 생명의 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오직 춤으로 살아왔고, 그 기운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전히 뜨겁다. 잔잔히 미소 짓는 온화한 얼굴, 그 안에 박동하는 숨결은 우리 전통이 가진 정중동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글. 성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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